최씨에는 어떤 본관들이 있고 시조는 어떤 분들일까?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최씨의 인구는 약 200만 명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4.8%에 달하는데 최씨의 본관은 326 본관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단순한 지명에 불과하고 시조가 확인되는 최씨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도 모두 현존하는 최씨의 본관이 아니고 상당한 본관이 후손이 없다.

본관 시조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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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성최씨(杆城崔氏) 최지순(崔之洵) 강릉최씨 최필달의 후손이라고 한다.

강릉최씨(江陵崔氏) 최필달(崔必達) 후손 = 대한민국 대통령 최규하

강릉최씨(江陵崔氏) 최문한(崔文漢)

강릉최씨(江陵崔氏) 최흔봉(崔欣奉) 전주최씨였으나 강릉최씨가 되었다.

강진최씨(康津崔氏) 최택(崔澤) 탐진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강화최씨(江華崔氏) 최익후(崔益厚)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개녕최씨(開寧崔氏) 최연(崔淵) 청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개성최씨(開城崔氏) 최우달(崔佑達) 아들 최응(崔凝)이 개성에 살았다.

거창최씨(居昌崔氏) 최종민(崔宗敏)

경주최씨(慶州崔氏) 최치원(崔致遠) 소벌도리공의 후손이라고 한다.

계림최씨(鷄林崔氏) 최윤순(崔允順)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부최씨(古阜崔氏) 최척(崔陟)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죽최씨(孤竹崔氏) 최치(崔峙)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곡강최씨(曲江崔氏) 최호(崔湖) 전주최씨 복야공계의 후손이라고 한다.

광양최씨(光陽崔氏) 최한영(崔漢英) 초계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광주최씨(廣州崔氏) 최득보(崔得寶)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괴산최씨(槐山崔氏) 최세진(崔世珍)

금천최씨(今川崔氏) 최숙정(崔淑精) 양천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길주최씨(吉州崔氏) 최유정(崔有井)

나주최씨(羅州崔氏) 최자호(崔自湖) 탐진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낭주최씨(朗州崔氏) 최흔(崔昕)

대령최씨(大寧崔氏) 최자염(崔子廉)

동주최씨(東州崔氏) 최준옹(崔俊邕) 후손=고려말 장군 최영, 육당 최남선

등주최씨(登州崔氏) 최기열(崔基烈)

무주최씨(茂朱崔氏) 최북(崔北)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문경최씨(聞慶崔氏) 최대규(崔大奎)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밀양최씨(密陽崔氏) 최환(崔環) 경주최씨 화숙공파의 후손이란 설이있다.

보령최씨(保寧崔氏) 최창익(崔昌益)

봉산최씨(鳳山崔氏) 최윤(崔倫)

부안최씨(扶安崔氏) 최창일(崔昌一) 청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삭령최씨(朔寧崔氏) 최천로(崔天老) 후손=조선 세종 때 최항(崔恒)

상원최씨(祥原崔氏) 최응(崔凝) 개성최씨에서 나누어졌다고 한다.

상주최씨(尙州崔氏) 최춘원(崔春元)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서화최씨(瑞和崔氏) 최공철(崔公哲)

성주최씨(星州崔氏) 최맹하(崔孟河)

수성최씨(隋城崔氏) 최영규(崔永奎) 경주김씨로 신라 경순왕의 후손이라고 한다.

수원최씨(水原崔氏) 최정(崔靖)

수원최씨(水原崔氏) 최상저(崔尙 )

순천최씨(順天崔氏) 최익(崔瀷) 전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신풍최씨(新豊崔氏) 최만강(崔萬江)

신풍최씨(新豊崔氏) 최순(崔珣)

아산최씨(牙山崔氏) 최예입(崔禮立)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안동최씨(安東崔氏) 최광윤(崔光胤) 고려 평장사 문영공 최언위의 큰아들이다.

양주최씨(楊洲崔氏) 최억(崔億)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양천최씨(陽川崔氏) 최원(崔遠) 전주최씨 문열공 최순작의 후손이라고 한다.

연풍최씨(延豊崔氏) 최지강(崔至崗)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영광최씨(靈光崔氏) 최산보(崔山甫)

영암최씨(靈巖崔氏) 최홍의(崔洪儀)

영천최씨(永川崔氏) 최한(崔漢) 전주최씨 복야공 최균의 후손이라고 한다.

영흥최씨(永興崔氏) 최지미(崔之美)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완산최씨(完山崔氏) 최수강(崔秀崗) 전주최씨 문성공 최아의 후손이라 한다.

용강최씨(龍岡崔氏) 최지무(崔枝茂) 청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용궁최씨(龍宮崔氏) 최현(崔玄)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용주최씨(龍州崔氏) 최광(崔光) 대녕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우봉최씨(牛峰崔氏) 최원호(崔元浩)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원주최씨(原州崔氏) 최보은(崔寶隱)

의주최씨(義州崔氏) 최효일(崔孝一)

전의최씨(全義崔氏) 최수경(崔守慶)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순작(崔舜爵)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최균(崔均)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아(崔阿)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전주최씨(全州崔氏) 최군옥(崔群玉) 경상도 상산(尙山)에서 왔다고 한다.

정주최씨(貞州崔氏) 최인저(崔仁沮)

죽산최씨(竹山崔氏) 최서(崔 ) 해주최씨 최충의 후손이라고 한다.

중원최씨(中原崔氏) 최홍사(崔弘嗣)

직산최씨(稷山崔氏) 최홍재(崔弘宰)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진산최씨(珍山崔氏) 최개(崔漑) 전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진주최씨(晋州崔氏) 최정(崔精)

창녕최씨(昌寧최씨) 최종번(崔宗番)

천령최씨(川寧崔氏) 최흥(崔興)

청송최씨(靑松崔氏) 최경(崔京) 해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청주최씨(淸州崔氏) 최기우(崔基遇)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초계최씨(草溪崔氏) 최용궁(崔龍宮) 전주최씨 문열공 최순작의 후손이라고 한다.

충주최씨(忠州崔氏) 최승(崔陞)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왔다고 한다.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철(崔哲) 상조(上祖)지만 세대가 연결되지 않는다.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응규(崔應奎)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준량(崔俊良)

탐진최씨(耽津崔氏) 최효노(崔孝老)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윤덕(崔允德)

탐진최씨(耽津崔氏) 최총(崔聰)

탐진최씨(耽津崔氏) 최홍건(崔弘建)

탐진최씨(耽津崔氏) 최민상(崔 祥)

태원최씨(太原崔氏) 최산령(崔令山) 중국 명나라 만력 17년 중국에서 왔다.

태인최씨(泰仁崔氏) 최용전(崔勇田)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통천최씨(通川崔氏) 최경현(崔景賢)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평창최씨(平昌崔氏) 최유혁(崔有奕)

풍천최씨(豊川崔氏) 최언영(崔彦英)

하양최씨(河陽崔氏) 최원정(崔源鼎)

한남최씨(漢南崔氏) 최홍행(崔洪 )

함양최씨(咸陽崔氏) 최인(崔寅)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함열최씨(咸悅崔氏) 최호(崔浩)

해주최씨(海州崔氏) 최온(崔溫) 후손 = 해동공자 최충, 조선 세종 때 최만리

화순최씨(和順崔氏) 최부(崔溥) 고려 문하평장사 최계(崔桂)를 1세로 한다.

황주최씨(黃州崔氏) 최남혁(崔南赫) 전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회령최씨(會寧崔氏) 최신(崔愼)

흥해최씨(興海崔氏) 최호(崔湖) 전주최씨 복야공 최균의 10세손이라고 한다.

*** 비고에 적힌 "누구의 후손이라고 한다"는 기록은 대체로 "최씨경주대동기원설"을 근거로 하고 있어서그대로 믿기 어렵다.

 

해설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857년(신라 헌안왕 1년)에 태어난 신라 말기의 학자로 자는 고운(孤雲)이다. 경주최씨

(慶州崔氏)의 시조라고 하기도 한다. 12세에 당(唐)나라에 유학(留學)하여 17세에 당나

라 과거에 급제하여 승무랑시어사 내봉공이 되어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879년(신라 헌강왕 5년) 황소의 난에 출전하여 격문을 써서 이름을

떨쳤다. 28세에 귀국하여 893년(진성왕 7년) 견당사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고 이듬해에 시무십여조를 만들어 아찬이 되었다.

공은 난세를 한탄하며 전국 각지를 유랑하다가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공의 제자 중에는 고려에서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고 신당서 예문지에 공의 사륙집(四

六集) 1권과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외에도 봉암사 비문, 숭복사

비문, 석순응전 등이 유명하다.

경남 하동의 쌍계사에 있는 국보 47호 진감선사비의 비문은 공이 지은 것이다.

소벌도리공.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거서간조에는 "시조는 성이 박씨요 휘는 혁거세이다......

고허촌 촌장 소벌도리공(소벌공 이라고 하기도 한다)이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 이라는 우

물(井) 옆 숲(林) 사이에서 말(馬)이 무릎(膝)을 꿇고 울고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가

까이 가 보았더니 어느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卵) 하나가 있어서 그 알을 깨어보

니 어린아이(兒)가 나와(出) 데려다가 길렀다. 이 아이의 나이가 10여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고 6부의 사람들은 그의 출생이 신기하다 하여 존경하며 따르다가 이에 이르러

임금으로 세웠다......."라고 되어있다.

한편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둘

째는 돌산 고허촌이니 촌장은 소벌도리이다. 처음에 형산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정

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라고 부르는 곳으로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

남쪽 마을이 여기에 속한다.(지금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다. 이하 모

두 같다)........"라고 했다.

또 삼국사기 신라 본기 유리이사금조에 "유리 이사금 9년 봄에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그들

에게 각각 성(姓)을 주었다. 양산부는 양부로 고치고 그 성을 이씨로 하였으며 고허부는

사량부로 고치고 그 성을 최씨로 하였으며 대수부는 점량부(모부 라고도 함)로 고치고

그 성을 손씨로 하였으며 간진부는 본피부로 고치고 그 성을 정씨로 하였으며 가리부는

한비부로 고치고 그 성을 배씨로 하였으며 명활부는 습비부로 고치고 그 성을 설씨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여 소벌도리공의 후손인 고허부를 사량부로 고치고 그들에게 최씨

성을 주었다고 했다.

한편 소벌도리공의 선조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이보다 앞서 고조선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아 여섯 개 마을을 이루었으니...."라고 설명하여 소벌도리공을 비롯한

여섯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고조선의 유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최영(崔塋)

1316-1388. 고려 말기의 명장. 여러 번 왜구를 크게 격파하여 왜구들이 "백수 최만호

(白首崔萬戶)"라고 불렀다고 한다. 철령위 문제로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 시

켰으나 부하 이성계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란을 일으켜 이성계에 잡혀 고양으

로 유배 된 후 죽음을 당했다.

그는 죽을 때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면 무덤에 풀이 않날 것이라고 말했는데 지금도 무덤

에 풀이 나지 않고 붉은 무덤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최항(崔恒)

1409-1474. 조선 세조 때 문신.

1434년(세종 16년) 문과에 급제 1443년 집현전 학사로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

여했으며 다시 용비어천가를 주해했다. 계유정란에 참여하여 정란 1등공신이 되었고

1466년 영의정이 되었다.

최광윤(崔光胤)

문영공 최언위의 큰아들. 고려 초기의 충신으로 진(晉)나라에 유학하던 중 거란의 포로

가 되었으나 그의 재주를 인정받아 거란에서 관리가 되었다. 이 때 거란이 고려를 공격

하기 위하여 준비함을 보고 비밀리에 고려에 보고하여 고려 정종이 30만 대군으로 광군

(光軍)을 창설하여 서경에 주둔시켜 이에 대비하게 했다.

문영공 최언위(文英公 崔彦 )

868-944. 전주최씨의 선조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대부분의 전주최씨가 소벌도리공에 이

어서 전주최씨의 원시조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고려사 최언위 열전에는 "최언위

는 처음 이름이 최신지(崔愼之)이며 경주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글을 잘 했다. 신라 말기

18세에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여 당나라 예부시랑 설정규 아래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니 발해의 재상 조소도의 아들 광찬도 함께 급제했다....."라고 하여 경주출신이라

고 적고 있다.

또 고려사 최언위 열전에는 ".....최언위는 42세에 신라로 귀국하여 집사성 시랑과 서서원

학사 벼슬을 했다. 이어 고려 태조가 고려를 개국하자 가족을 데리고 고려로 와서 태자

사부가 되었으며 고려 조정이 그에게 문한(文翰)의 책임을 모두 맡기니 고려 궁궐의 건물

이름은 모두 그가 지은 것이다.

당시의 귀공자들이 모두 그를 섬겼고 벼슬은 대상원봉 태학사 한림원령 평장사에 이르렀

다. 고려 혜종 원년에 돌아가시니 그의 나이는 77세였다. 그의 부음을 들은 왕은 매우

슬퍼하며 정광 벼슬을 다시 내리고 시호를 문영공이라고 했다......"라고 했다.

문열공 최순작(文烈公 崔純爵)

고려 정종 때 벼슬에 나가 고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병

부상서 겸 신호위 상장군이 되었고 완주개국백(完州開國伯)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1108

년 9월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으나 고증 해 보면 잘못된 연대인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열공이다.

복야공 최균(僕射公 崔均)

전주최씨 복야공계의 시조이며 고려 명종 때 충신으로 자가 간유(幹儒)로 전주최씨 문중

에서는 복야공 또는 사도공(司徒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127년 완산 군수 박춘령이

연구(聯句)로 시(詩)를 짖는 시험을 열어 최척경, 최균, 최송년 3명의 어린이를 뽑아 완산

의 3최(完山之三崔)라고 부르고 이 3최는 모두 완산백 문영공 최언위의 후손이라고 하였

다. 고려 의종 때는 합문지후(閤門之候)라는 존호를 받았다. 1174년 서경 유수 조위총

이 정중부의 토벌을 내세우고 반란을 일으키자 동북로 도지휘사가 되어 토벌군을 지휘하

다가 화주에서 조위총의 부장 깁박승(金朴升)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문성공 최아(文成公 崔阿)

전주최씨 문성공계의 시조(始祖) 문성공(文成公)은 휘(諱)가 아(阿)이며 자(字)는 형지(衡

之)이고 시호(諡號)는 문성공(文成公)이며 완산군(完山君)이라는 존호(尊號)를 받았다.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태어나고 돌아가신 해 그리고 할

머니에 대한 기록은 전해오지 않는다.

청하최씨설(淸河崔氏說)

전주최씨 집안에 전해오는 전주최씨는 중국 당나라 청하에서 망명해 온 사람의 후손으로

한국 토착 최씨와는 혈통이 다르다는 설로 전주최씨 집안에서는 전통적으로 정설로 전

해오고 있으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는 전주최씨를 청하최씨라고 부르기도 했던 것 같다.

이와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전주최씨 문성공계 문성공 최아의 5세손 소윤공 최득지의 묘비문(墓碑文)에 "소윤공은

성이 최씨이며 휘는 득지로 전주 망명족의 후예이다. 공의 선조는 대대로 벼슬을 하였고

문성공의 대에 이르러 과거에 급제하였다." 라고 적혀있다.

전주최씨 문충공계 "최씨본원"에 "운부에 문충공 최군옥이 말씀하시기를 강태공의 후

손이 황제가 하사하신 나라를 사양하고 제나라 최읍(崔邑)에서 삶으로 최씨가 되었고 그

후에 청하 박릉에서 살면서 빛나는 성씨가 되었다. 문창후 최치원이 적은 혜소스님 비

(碑)에서 대략 말씀하시되 최씨의 선조는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사람들이다. 중국 산

동 지방에 살다가 수나라 양제께서 고구려를 정벌 할 때 많은 장사(壯士)가 죽었고 포로

가 되어 고구려의 예맥 지방에 정착하여 삶으로 우리나라 백성이 되었다. 그 후 당나라

가 우리나라를 네 개의 주로 나눌 때 전주 금마 사람이 되었으며 지금 전주최씨나 금마최

씨로 관향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후예다."라고 했다.

최씨경주대동기원설(崔氏慶州大同起源說)

한국의 모든 최씨는 사량부 최씨가 조상이며 소벌도리공이 원시조로 경주최씨를 중심으

로 하여 각 지방으로 흩어져 각 지방을 본관으로 하는 최씨가 나타났다고 하는 주장으로

믿기 어렵다.

<출처 : 아사달 죽산>

● 작은 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소한이 가장 추운 이유는?
농사를 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가장 중요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구분하는
" 24절기 "가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24절기를 응용하여 사용했지만
24절기는 중국을 기준으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차이가 조금씩 있었습니다.
사실 절기상으로 소한 다음에 있는 대한이 가장 추워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일 년 중 가장 추운 날은 소한이라고 합니다!소한과 대한

● 소한에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첫 해를 맞이하고 24절기 중 처음으로 오는 절기 소한이 다가오면
우리나라에서는 일 년 중 가장 추운 추위가 닥쳐옵니다.
매서운 한파가 다가오는 이때 농가에서는
혹한에 대비하는 준비를 하곤 합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먹거리 생필품 등을 쉽게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양식을 창고에 보관하기도 하고 집을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땔감을 집안 곳곳에 구비해두기도 합니다.
[ 24절기 중, 마지막 24절기 대한이란? ]

 

.대한은 이름 그대로 큰 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요.
절기상으로 보면 소한 다음에 대한이 오기 때문에 대한이
추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위에 글을 보시면
알듯이 우리나라는 소한이 가장 춥습니다.
이 때문에 대한과 소한에는 " 춥지 않은 소한 없고
포근하지 않은 대한 없다. "등많은 대한과 소한의
속담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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