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81년 1월 8일 치.
‘음료수 상인들은 쩡쩡하고 밤새 얼어터지는 음료수 병들의 깨지는 비명소리에 밤잠을 설쳐야 했고 닭의 해에 암탉들은 추위에 볶여 알을 낳지 못했다’
‘최저 영하 30도가 고작인 백엽상 수온계의 밑바닥을 내리치고 곤두박질을 하는 통에 특수 온도계를 긴급히 구해다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 -동아일보 1981년 1월 8일치
동아일보 1981년 1월 7일 치.
‘가게 안에 진열해둔 음료수나 맥주 소주 등 얼 것은 모두 얼어버렸고 수도가 막혔으며 김칫독이 깨졌는가 하면 안방의 벽과 천장에까지 성에가 끼었다’
‘양평을 통과하는 차들의 차창엔 성에라기보다는 차라리 두꺼운 얼음이 끼어 시야를 가려 버렸고 거리는 은백의 눈에 파묻힌 채 가라앉았다 ’ -동아일보 1981년 1월 7일 치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추위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동아일보 1981년 1월 7일치 ‘북극권이 된 양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면, 1904년 문을 연 중앙 관상대(지금의 기상청)가 기상일별통계를 내기 시작한 이래 최저 기온의 혹한을 기록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이 기록은 37년이 지난 2018년 1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 다른 지면을 통해서도 당시 양평의 혹한 상황을 덧붙여 설명했다. 특히 양평군청 관계자의 말을 빌려 주민들이 추위에 떨면서도 혹시 관측소의 계기가 잘못돼 영하 32.5도나 기록한 것 아니냐는 의문들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양평은 예부터 지형의 영향으로 겨울에 추운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었지만, 당시 군민들조차도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는 겪어 보지 못한 ‘역대급 혹한’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향신문 1981년 1월 7일 치.
경향신문은 당시 양평의 모습에 대해 ‘양평은 다음 날인 6일에도 기온이 영하 31.5도까지 내려가 마치 동토처럼 꽁꽁 얼어붙어 9만 6000명의 주민들은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 죽음의 마을을 방불케 했다’고 묘사했다.
경향신문 1981년 1월 8일 치.
경향신문은 7일과 8일 이틀에 걸쳐 한파가 불러온 동네 풍경을 담은 사진을 기사와 함께 실었다. 7일에는 비닐봉지를 머리에 쓰고 총총걸음으로 집으로 가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았고, 8일에는 꽁꽁 얼어붙은 땅으로 인해 바빠진 청소부의 모습을 넣었다.
경향신문은 추위의 원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양평은 해발 1157m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고, 남한강도 끼고 있다. 이 때문에 찬기류의 영향을 받은 데다 대기오염이 없어 기온이 급격한 하강 현상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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