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을 서정을당신께 드립니다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녁 먼 들 어스름이
내 눈 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 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 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 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가을 / 김현승(1913-1975) 호 茶兄 .광주.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 시선집> 관동출판사.1974년

 

가을 / 릴케(1875-1926) 

나뭇잎이 떨어진다,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든 듯
저기 아득한 곳에서 떨어진다
거부하는 몸짓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밤마다 무거운 대지다

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진다
다른 것들을 보라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이 떨어짐을 한없이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내는 어느 한 분이 있다

 

가을 / 마종기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가을 / 문인수 

여러 번 붉게 큰물 지고 나서
어느 날은 차디차게 발목에 감기는
가을

하늘에다가는 달게 감홍시 하나 남겨 놓듯이
누군가는 또 한나절 땅에다가는
그러나 그랬달 것도 없이
어느 날은 넌지시 징검다리 놓이는

 

가을 / 백남석 작사. 현제명 작곡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푸른 잎은 붉은 치마 갈아입고서
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모아

봄이 오면 다시 오라 부탁하노라
가을이라 가을 바람 솔솔 불어오니
밭에 익은 곡식들은 금빛같구나

추운 겨울 지낼 적에 우리 먹이려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양식

 

가을 /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긋이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별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아부치는 가을이었다

콩새야, 니 여태 거기서 머하고 있노
어여 콩알 주워가지 않구.
다래넝쿨 위에 앉아 있던 콩새는 자신을 들킨 것이 부끄러워
꼭 콩새만한 가슴을 두근거리는 가을이었다


가을 /  양주동(1903-1977) 호는 无涯 개성출생. 와세대 영문과졸. 

가 없는 빈들에 사람을 보내고
말없이 돌아서 한숨 지우는
젊으나 젊은 아낙네와 같이
가을은 애처러이 돌아옵니다

애타는 가슴을 풀 곳이 없어
옛뜰의 나무들 더위잡고서
차디찬 달 아래 목놓아 울 때에
나뭇잎은 누런 옷 입고 조상합니다

드높은 하늘에 구름은 개어
간 님의 해맑은 눈자위 같으나
수확이 끝난 거칠은 들에는
옛님의 자취 아득도 합니다

머나먼 생각에 꿈 못 이루는
밤은 깊어서 밤은 깊어서
창 밑에 귀뚜라미 섧이 웁니다
가을의 아낙네여, 외로운 이여 ...

<조선의 맥박>. 문예공론사.1932년

 
 

가을  /정호승

돌아보지 마라
누구든 돌아보는 얼굴은 슬프다
돌아보지 마라

지리산 능선들이 손수건을 꺼내 운다
인생의 거지들이 지리산에 기대앉아
잠시 가을이 되고 있을 뿐
돌아보지 마라
아직 지리산이 된 사람은 없다

 

가을  /조병화
 

가을은 하늘에 우물을 판다
파란 물로
그리운 사람의 눈을 적시기 위하여
깊고 깊은 하늘의 우물
그곳에
어린 시절의 고향이 돈다

그립다는거, 그건 차라리
절실한 생존 같은거
가을은 구름 밭에 파란 우물을 판다
그리운 얼굴을 비치기 위하여

 

가을 / 조병화(1921- ) 경기도 안성.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 뜻대로 가을은 이루어져갑니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가을을

하나, 하나, 주워 모으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이제, 일년내 맡고 계시던
그 눈을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실로 많은 것들이 끝을 지어갑니다

대지에선 동식물들이 그 번식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그 열매들이 남아갑니다
하늘에선 태양과 구름이 그 가뭄과 홍수를 거둬 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다시, 빈 천지가 마련되어 갑니다
사람에선 사랑과 미움이 그 스스로의 맺음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당신 뜻대로 고독한 혼자들이 남아갑니다

그 열매들을 당신 뜻대로 주워 모으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가득찬 빈 천지에 새 봄을 마련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 고독한 혼자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떠나려는 내게
맡으신 그 눈을 이제 돌려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맑게 닦아내 주십시오
흐린 점 하나 없이 맑게 닦아 내 주십시오
당신의 입김으로
티 하나 없이 맑게 닦아 내 주십시오
도시에선 되도록이면 담가로
돌아다니겠습니다

전원에선 물가로 둑으로 산록山麓으로
되도록이면 잡목림, 잡초 속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밤에는 별에서 쉬겠습니다

되도록이면 새로운 별을 찾아
좀 떨어진 곳에서 쉬겠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빈 손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모든 거 다, 당신 뜻대로 살펴 제자리 가려두고
지닌 거 하나 없이 혼자서 돌아오겠습니다

수고는
봄으로 해 주십시오
눈을 다시 돌려 드릴 때
수고의 말씀
봄에 받겠습니다

<내일 어느 자리에서> 춘조사. 1965년

 

가을 / 토마스 흄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밖으로 나왔더니
얼굴이 붉은 농부처럼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있었다

나는 말은 건네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가장자리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창백했다

Thomas Hulme(1883-1917) 영국

 

가을걷이     /  문인수 

달구지 타고 갈 때
나락단 거두러 갈 때
막바리 그득 싣고 돌아올 때
첨벙첨벙 물로 건너는
건너다가 슬며시 물 마시는

기다렸다가 또 한 칸
한 칸

징검다리 건너는 물잠자리
뒤에 뒤에 아버지
 

가을날 /  노천명
 

겹옷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산산한 기운을 머금고...
드높아진 하늘에 비로 쓴 듯이 깨끗한
맑고도 고요한 아침...

여기저기 흩어져 촉촉히 젖은
낙엽을 소리없이 밟으며
허리때 같은 길을 내놓고
풀밭에 누어 거닐어보다

끊일락 다시 이어지는 벌레 소리
애연히 넘어가는 마디마디엔
제철의 아픔이 깃들였다
곱게 물든 단풍 한 잎 따들고
이슬에 젖은 치마자락 휩싸여쥐며 돌아서니

머언 데 기차 소리가 맑다

 

가을날  /  릴케(1875-1926)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가을날   / 서거정(1420-1488) 

띳집은 대숲 길로 이어져 있고
가을 햇살 맑고 곱게 빛나네
열매가 익어서 가지는 늘어지고
마지막 남은 덩굴에는 오이도 드무네
여전히 벌은 날개짓 그치지 않고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어 졸고 있네
참으로 몸과 마음 고요하구나
물러나 살자던 꿈 이루어졌네

 

가을날   /  손동연
 

코스모스가
빨간 양산을 편 채
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ㅡ얘
심심하지?
들길이
빨간 양산을 받으며
함께 걸어가주고 있었다
 

가을 넥타이     /  김현승 

볕은
耳順하고
이삭들
바람이 익는다

아침 저녁
살갗에 묻는
요즈막의 향깃한 차거움 ...
四十은 아직도 溫血動物인데

오늘은
먼 하늘빛
넥타이 매어 볼까

 

가을 노트  /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가을 달 /   장옥관(1955 - ) 구미
 

납작 마당에 엎디어 불볕을 견딘 채송화
꽃따지 키 낮은 꽃들
떠밀리고 떠밀려 어스름 속 수제비국을
받아들면 거기,
국물 속에 떠오르는 또 하나 감자알

감자는 자주 목이 메이지. 단칸 셋방 옹기종기 모여앉은 식구들
누군가의 발길질에 끓던 국솥이 뒤집어지고, 생각의 어둠이
대문 안으로 밀려들고, 아이들은 소리치며 골목으로 내달아친다

국은 기름때의 세월은 진 냄비처럼 마당에 굴러 떨어져
 이윽고 여름이 지나는 것이다
늙은 어머니는 화단의 봉숭아를 뜯어 달아나려는 열 손가락을
칭칭 붙들어매고, 
식은 국물 속 죽은 귀뚜라미를 남몰래 건져 내고,
마루까지 몰려온 어둠을 천천히 쓸어 내린다

.....

아이들이 벗은 무르팍
딱딱한 피딱지를 떼어내면 묵은 상처 속
봉숭아 손톱같은 달은 다시 차오르고 

가을 맑은 날  /   나태주 

햇빛 맑고 바람 고와서
마음 멀리 아주 멀리 떠나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벼 벤 그루터기 새로 돋아나는
움벼를 보며
들머리밭 김장배추 청무 이파리

길을 따라서
가다가 가다가
단풍의 골짜기
겨우겨우 찾아낸

감나무골
사람들 버리고 떠난 집
담장 너머 꽃을 피운 달리아
더러는 맨드라미

마음아, 너무 오래 떠돌지 말고
날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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