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 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이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가을밤 / 이 기철
나는 나뭇잎 지는 가을밤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에는 때로 슬픔이 묻어 있지만
슬픔은 나를 추억의 정거장으로 데리고 가는 힘이 있다
나는 가을밤 으스름의 목화밭을 사랑한다
목화밭에 가서, 참다참다 끝내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울음 같은 목화송이를 바라보며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것임을 생각하고, 저것이
세상에서 제일 보드랍고 이쁜 것임을 생각하고
토끼보다 더 사랑스러운 그 야들야들한 목화송이를 만지며
만지며
내가 까아만 어둠 속으로 잠기어 가던 가을 저녁을 사랑한다
그 땐 머리 위에 일찍 뜬 별이 돋고 먼 산 오리나무 숲 속에선
비둘기가 구구구 울었다
이미 마굿간에 든 소와 마당귀에 서 있는 염소를 또 나는 사랑한다
나락을 실어 나르느라 발톱이 찢겨진 소, 거친 풀, 센 여물에도
좋아라 다가서던
어둠 속에서 툭툭 땅을 차고 일어서서 센 혓바닥으로
송아지를 핥을 때마다 혀의 힘에 못 이겨 비틀거리던
송아지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일하는 소를, 일하다가 발톱이 찢겨진 소를 사랑한다
이미 단풍나무 끝에 가볍고 파아란 집을 매달고 겨울잠에 들어간
가을 벌레를 나는 사랑한다
그 집은 생각만 해도 얼마나 따뜻한가
수염을 곧추세우고 햇빛을 즐기며 풀숲을 누비던
여치와 버마제비들
섬돌의 이른 잠을 깨우며 서릿밤을 울던
귀뚜라미를 나는 사랑한다
생각하면 나는 화려한 것의 반대켠에서 고요하고 적막한 것에 길들여져 왔다
쑥갓꽃 패랭이꽃 손톱꽃 앉은뱅이꽃,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
그래서 잊혀지지 않는 것들을 나는 사랑한다
점점 깊어가는 가을밤의 나뭇잎 지는 소리
밤나무 뿌리를 적시며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나는 사랑한다
세상이 가장 조그마해지고 따뜻해지는 가을밤을
불켜지 않아도 마음이 화안한 가을밤을 나는 사랑한다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가을 새벽 / 권태응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
어서 밤이 새라고, 닭들 꼬기오
고요한 새벽 하늘
울 리는 소리 ...
먼 길 손님 타라고, 기차 삐익삑
고요한 새벽 하늘
울리는 소리 ...
부지런한 타작꾼 기계 타알탈
가을아침 / 황동규
오래 살던 곳에서 떨어져내려
낮은 곳에 모여 추억 속에 머리 박고 살던 이파리들이
오늘 아침 銀옷들을 입고
저처럼 정신없이 빛나는구나
말라가는 신경의 참응ㄹ 수 없는 바스락거림 잠재우고
시간이 증발한 눈으로 시간석을 내다보자
방금 黃菊의 聲帶에서 굴러 나오는 목소리
저 황금 고리들, 태어나며 곧 사라지는
저 삶의 입술들!
가을 아침에 / 소월
아득한 퍼스레한 하늘 아래서
회색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섶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말락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싸여 오는 모든 기억은
피 흘린 상처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 속이 가비얍던 날
그리운 그 한 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가을에 / 기형도
잎 진 가지에
이제는 무엇이 매달려 있나
밤이면 유령처럼
벌레 소리여
네가 내 슬픔을 대신 울어줄까
내 음성을 만들어 줄까
잠들지 못해 여윈 이 가슴엔
밤새 네 울음 소리에 할퀴운 자국
홀로 된 아픔을 아는가
우수수 떨어지는 노을에도 소스라쳐
멍든 가슴에서 주르르르
네 소리
잎 진 빈 가지에
내가 매달려 물어볼까
찬바람에 떨어지고
땅에 부딪혀 부서질지라도
내가 죽으면
내 이름을 위하여 빈 가지가 흔들리면
네 울음에 섞이어 긴 밤을 잠들 수 있을까
가을에 /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에 항거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행雁行ㅡ이마와 가스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행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ㅡ 국화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은 또 한번 뒷문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묻은 얼굴들을 추켜들 때일세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을 아는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가을에 / 오세영
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
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
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가을에는 /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픔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가을엽서 / 안도현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가을은 눈眼의 계절 / 김현승
이맘때가 되면
당신의 눈은 나의 마음
아니, 생각하는 나의 마음보다
더 깊은 당신의 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낙엽들은 떨어져 뿌리에 돌아가고
당신의 눈은 세상에로 순수한 언어로 변합니다
이맘때가 되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가을 하늘 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떠나서 생각하고
그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낙엽들이 지는 날 가장 슬픈 것은
우리들 심령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 ....
가을의 기도 / 김현승(1913-197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 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옹호자의 노래> 선명문화사.1963년
가을의 노래 / Pierre Charles Baudelaire
1
이윽고 우리는 가라앉을 것이다. 차디찬 어두움 속으로
너무나도 짧은 우리의 여름날, 그 강렬한 밝음이여 안녕히!
불길스러운 충격을 전하며 안마당 돌 블록 위에
던져지고 있는 모닥불 타는 소리를 나는 벌써 듣는다
이윽고 겨울 그것이 내 존재에 돌아오리니, 분노와 증오와
전율과 공포와 강제된 쓰라린 노고
그리고 북극의 지축에 걸린 태양과 같이
나의 심장은 이제 언 붉은 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던져지며 떨어지는 장작더미 하나하나를 나는 떨면서 듣노니
세워진 단두대의 울음조차 이렇듯 둔탁하지 않다
나의 정신은 성문을 파괴하는 무거운 쇠망치를 얻어맞고
허물어지는 성탑과도 같아라
이 단조로운 충격에 내 몸은 흔들리어
어디선가 관에다 서둘러 못질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를 위하여? ㅡ 어제는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가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는 어디엔가 문밖에 나서기를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2
나는 사랑한다, 네 길다란 눈, 그 초록빛 띤 빛을
상냥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여, 이제 내게는 모든 것이 흥미없다
그 어떤 것도 그대의 사랑도 침실도 또 난로도
해변에 빛나는 태양보다 낫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도 상냥스러운 사람이여! 역시 나를 사랑해 주오
비록 내가 은혜를 모르는 자요, 심술쟁이라도 내 어머니가 되어다오
연인이면서 누이동생이기도 한 사람이여, 비록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하더라도
석양의 상냥스러움, 빛나는 가을의 상냥스러움이 되어다오
얼마 남지 않은 노력! 무덤이 기다리고 있나니, 탐욕스러운 무덤이다!
아아! 당신의 무릎에 이마를 기댄 채 나로 하여금
한껏 잠기게 해다오 백열의 여름을 그리워하며
만추의 날 그 상냥스러운 황색 광선 속에서!
Pierre Charles Baudelaire(1821-1867) 프랑스 파리
가을의 시 - / 연화리 시편26 곽재구
오후 내내 나룻배를 타고
강기슭을 따라 내려갔습니다
당신이 너무 좋아하는 칡꽃 송이들이
푸른 강기슭을 따라 한없이 피어 있었습니다
하늘이 젖은 꿈처럼 수면 위에 잠기고
수면 위에 내려온 칡꽃들이
수심 한가운데서
부끄러운 옷을 벗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어가고
지천으로 흩날리는 꽃향기 속에서
내 작은 나룻배는
그만 길을 잃고 맙니다
<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열림원. 1999년
가을의 시 /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汽笛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가을의 시 / 장석주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연인들은 헤어지게 하시고
슬퍼하는 자들에겐 더 큰 슬픔을 얹어주시고
부자들에게선 귀한 걸 빼앗아
재물이 하잖은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학자들에게는 치매나 뇌경색을 내려서
평생을 닳도록 써먹은 뇌를 쉬게 하시고
운동선수들의 뼈는 분리해서
혹사당한 근육에 긴 휴식을 내리소서
스님과 사제들은
조금만 더 냉정하게 하소서
전쟁을 하거나 계획 중인 자들은
더 호전적이 되게 하소서
폐허만이 평화의 가치를 알게 하니
더 많은 분쟁과 유혈혁명이 일어나게 하소서
이 참담한 지구에서 뻔뻔스럽게 시를 써온 자들은
상상력을 탕진하게 해서
더는 아무 것도 쓰지 못하게 하소서
휴지로도 쓰지 못하는 시집을 내느라
더는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다만 사람들이 시들고 마르고 바스러지며
이루어지는 멸망과 죽음들이
왜 이 가을의 축복이고 아름다움인지를
부디 깨닫게 하소서
<시와 사상>2008년 가을호
가을의 유혹 / 박인환
가을은 내 마음에
유혹의 길을 가르친다
숙녀들과 바람의 이야기를 하면
가을은 다정한 피리를 불면서
회상의 풍경을 지나가는 것이다
전쟁이 길게 머무른 서울의 노대에서
나는 모딜리아니의 화첩을 뒤적이며
적막한 하나의 생애의 한 시름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
가을은 청춘의 그림자처럼 또는
낙엽 모양 나의 발목을 끌고
즐겁고 어두운 사념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즐겁고 어두운 가을의 이야기를 할 때
목메인 소리로 나는 사람의 말을 한다
그것은 폐원에 있던 벤치에 앉아
고갈된 분수를 바라보며
지금은 죽은 소녀의 팔목을 잡던 것과 같이
쓸쓸한 옛날의 일이며
여름은 느리고 인생은 가고
가을은 또 다시 오는 것이다
가을의 향기 / 김현승
남쪽에선
과수원의 임금林檎이 익는 냄새
서쪽에선 노을이 타는 내음 ...
산 위에 마른 풀 향기,
들가엔 장미들이 시드는 향기 ...
당신에겐 떠나는 향기,
내게는 눈물과 같은 술의 향기
모든 육체는 가고 말아도
풍성한 향기의 이름으로 남는
傷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여
높고 깊은 하늘과 같은 것들이여
가을이 가는구나 / 김용택
이렇게 가을이 가는구나
아름다운 시 한편도
강가에 나가 기다릴 사랑도 없이
가랑잎에 가을빛같이
정말 가을이 가는구나
조금 더 가면 눈이 오리
먼 산에 기댄그대 마음에
눈은 오리
산은 그려지리
가을이 아름다운 건 / 이해인
구절초, 마타리,
쑥부쟁이꽃으로
피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이름이 그리운 얼굴이
봄 여름 헤매던 연서들이
가난한 가슴에 닿아
열매로 익어갈 때
몇 몇은 하마 낙엽이 되었으리라
온종일 망설이던 수화기를 들면
긴 신호음으로 달려온 그대를
보내듯 끊었던 애잔함
뒹구는 낙엽이여
아, 가슴의 현이란 현 모두 열어
귀뚜리의 선율로 울어도 좋을
가을이 진정 아름다은 건
눈물 가득 고여오는
그대가 있기 때문이라
가을 저녁 / 김현승
긴 돌담 밑에
땅거미 지는 아스팔트 위에
그림자로 그리는 무거운 가을 저녁
짙은 크레파스의 가을 저녁
기적은 서울의 가장자리에서
멀리 기러기같이 울고
겹친 공휴일을 반기며
먼 곳 고향들을 찾아 가는
오랜 풍속의 가을 저녁
사는 것은 곧 즐거움인 가을 저녁
눈들은 보름달을 보듯 맑아 가고
말들은 꽃잎보다 무거운 열매를 다는
호올로 포키트에 손을 넣고 걸어가도
외로움조차 속내의처럼 따뜻해 오는
가을 저녁 술에 절반
무등차에 절반
취하여 달을 안고
돌아가는 가을 저녁 ㅡ
흔들리는 뻐스 안에서
그러나 가을은 여름보다 무겁다!
시간의 잎새들이 떨어지는
내 어깨의 제목 위에선 ....
가을저녁에 / 소월
물은 희고 길구나, 하늘보다도
구름은 붉구나, 해보다도.
서럽다, 높아가는 긴 들 끝에
나는 떠돌며 울며 생각한다, 그대를
그늘 깊어 오르는 발 앞으로
끝없이 나아가는 길은 앞으로
키 높은 나무 아래로, 물마을은
성깃한 가지가지 새로 떠오른다
그 누가 온다고 한 언약도 없건마는!
기다려 볼 사람도 없건마는!
나는 오히려 못물가를 싸고 떠돈다
그 못물로는 놀이 잦을 때
가을 저녁의 시 / 김춘수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다는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는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거가 버리는가보다
가을 지붕 / 권태응
사다리를 타고서 한층 두층
언니 따라 지붕에 올라갑니다
박덩이 뒹굴대는 한옆에다
빨강 고추 흰 박고지 널어 놓아요
집집마다 지붕에도 울긋불긋
여기저기 그림같이 아름다워요
내려갈 줄 모르고 나는 자꾸만
멀리 멀리 사방 경치 바라봅니다
가을볕 / 박노해
가을볕이 너무 좋아
고추를 따서 말린다
흙마당에 널어놓은 빨간 고추는
물기를 여의며 투명한 속을 비추고
높푸른 하늘에 내걸린 빨래가
바람에 몸 흔들어 눈 부시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가만히 나를 말린다
내 슬픔을
상처난 내 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나는
살아온 날들을
'°♡。 영상&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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