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편지 /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 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워가고 있습니다
그 빈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사랑함으로 오히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가을하늘1 / 정완영
전선 위에 앉아 있는 제비들이 날아갑니다
가을 하늘 푸른 건반을 두드리며 날아갑니다
하늘엔 음악이 흐르고, 흰 구름이 흘러갑니다
가을 하늘2 / 정완영
요즘 하늘빛은 하루 한 길씩 높아가요
저러다 넘칠 것 같아요 무너질 것 같아요
구름도 따라가다가 지쳐 눕고 말아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 김용택
사랑의 온기가 더욱 더 그리워지는
가을 해거름 들길에 섰습니다
먼 들 끝으로 해가
눈부시게 가고
산 그늘도 묻히면
길가에 풀꽃처럼 떠오르는
그대 얼굴이
어둠을 하얗게 가릅니다
내 안에 그대처럼
꽃들은 쉼없이 살아나고
내 밖의 그대처럼
풀벌레들은
세상의 산을 일으키며 웁니다
한 계절의 모퉁이에
그대 다정하게 서 계시어
한없이 걷고 싶고
그리고 마침내 그대 앞에
하얀 풀꽃
한 송이로 서고 싶어요
낙엽끼리 모여 산다 / 조병화
낙엽이 누워 산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지나간 날을 생각지 않기로 한다
낙엽이 지는 하늘가에
가는 목소리 들리는 곳으로
나의 귀는 기웃거리고
얇은 피부는
햇볕이 쏟아지는 곳에 초조하다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살아서 가까이 가는 곳에 낙엽이 진다
아 나의 육체는
낙엽 속에 이미 버려지고
육체 가까이 또 하나
나는 슬픔을 마시고 산다
비 내리는 밤이면
낙엽을 밟고 간다
비 내리는 밤이면
슬픔을 디디고 돌아온다
밤은 나의 소리에 차고
나는 나의 소리를 비비고 날을 샌다
낙엽끼리 모여 산다
낙엽에 누워 산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슬픔을 마시고 산다
남겨진 가을 / 이재무
움켜진 손 안의 모래알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집착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이다
그렇게 네가 가고 나면 내게 남겨진 가을은
김장 끝난 텃밭에 싸락눈을 불러올 것이다
문장이 되지 못한 말들이
반쯤 걷다가 바람의 뒷발에 채인다
추억이란 아름답지만 때로는 치사한 것
먼 훗날 내 가슴의 터엔 회한의 먼지만이 붐빌 것이다
젖은 얼굴의 달빛으로 흔들리는 풀잎으로 서늘한 바람으로
사선의 빗방울로 박 속 같은 눈 꽃으로
너는 그렇게 찾아와 마음이 그릇 채우고 흔들겠지
아 이렇게 숨이 차 사소한 바람에도 몸이 아픈데
구멍난 조롱박으로 퍼올리는 물처럼 시간이 새고 있다
늦가을 / 김사인
그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앉아
그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시집<가만히 좋아하는> 창비.2006년
늦가을 / 이덕무(1741-1793)
작은 서재에 찾아온 가을날이 너무도 맑아
손으로 갈포 두건 바로잡고 물소리를 듣네
책상에 시편 있고 울타리엔 국화 피었으니
사람들은 이 그윽한 멋을 도연명 같다 말하네
약관의 나이에 박제가. 유득공.이서구와 함께
<건연집>이라는 시집을 냈다
서자로 태어나다
늦가을의 산책 / 헤세
가을비가 회색 숲에 흩뿌리고
아침바람에 골짜기는 추워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툭툭 떨어져
입을 벌리고 촉촉히 젖어 갈색을 띄고 웃는다
내 인생에도 가을이 찾아와
바람은 찢어져 나간 나뭇잎을 딩굴게 하고
가지마다 흔들어 댄다. 열매는 어디에 있나?
나는 사랑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괴로움이었다
나는 믿음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미움이엇다
바람은 나의 앙상한 가지를 쥐어 뜯는다
나는 바람을 비웃고 폭풍을 견디어 본다
나에게 있어서 열매란 무엇인가?
목표란 무엇이란 말인가!
피어나려 했었고, 그것이 나의 목표다
그런데 나는 시들어 가고
시드는 것이 목표이며 그 외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에 간직하는 목표는 순간적인 것이다
신은 내 안에 살고 내 안에서 죽고
내 가슴 속에서 괴로워 한다 이것이 내 목표로 충분하다
제대로 가는 길이든 헤매는 길이든
만발한 꽃이든 열매이든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이름에 불과하다
아침 바람에 골짜기가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져
힘있게 환하게 웃는다. 나도 함께 웃는다
들국화 / 노천명
들녘 비탈진 언덕에 네가 없었던들
가을은 얼마나 쓸쓸했으랴
아무도 너를 여왕이라 부르지 않건만
봄의 화려한 동산을 사양하고
이름도 모를 풀틈에서 섞여
외로운 계절을 홀로 지키는 빈들의 색시여
갈꽃보다 부드러운 네 마음 사랑스러워
거칠은 들녘에 함부로 두고 싶지 않았다
한아름 고히 안고 돌아와
화병에 너를 옮겨 놓고
거기서 맘대로 자라라 빌었더니
들에 보던 생기 나날이 잃어지고
웃음 거둔 네 얼굴은 수그러져
빛나던 모양은 한잎 두잎 병들어갔다
아침마다 병이 넘는 맑은 물도
들녘의 한 방울 이슬만 못하더냐?
너는 끝내 거칠은 들녘 정든 흙냄새 속에
맘대로 퍼지고 멋대로 자랐어야 할 것을
뉘우침에 떨리는 미련한 손이 이제
시들고 마른 너를 다시 안고
푸른 하늘 시원한 언덕 아래
묻어 주러 나왔다
들국화여!
저기 너의 푸른 천정이 있다
여기 너의 포근한 갈꽃 방석이 있다
들국화 / 천상병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순간이...
晩秋 / 이 용악
노오란 은행잎 하나
호리호리 돌아 호수에 떨어져
소리 없이 湖面을 미끄러진다
또 하나 ㅡ
조이삭을 줍던 시름은
요즈음 낙엽 모으기에 더욱더
해마알개졌고
하늘
하늘을 쳐다보는 늙은이 뇌리에는
얼어죽은 친지 그 그리운 모습이
또렷하게 피어오른다고
길다란 담뱃대의 뽕잎 연기를
하소에 돌린다
돌개바람이 멀지 않아
어린 것들이
털 고운 토끼 껍질을 벗겨
귀걸개를 준비할 때
기름진 밭고랑을 가져 못 본
부락민 사이엔
지난해처럼 또 또 그 전해처럼
소름 끼친 대화가 오도도오 떤다
봉선화 / 김형준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김형준 시. 홍난파 작곡. 1920년 발표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 / 임태주
가을해가 풀썩 떨어집니다
꽃살 무늬 방문이 해 그림자에 갇힙니다
몇 줄 편지를 쓰다 지우고 여자는
돌아앉아 다시 뜨게질을 합니다
담장 기와 위에 핀 바위솔꽃이
설핏설핏 여자의 눈을 밟고 지나갑니다
뒤란의 머위잎 몇 장을 오래 앉아 뜯습니다
희미한 초생달이 돋습니다
봉숭아 꽃물이 남아있는 손톱끝에서
詩는 사랑하는 일보다 더 외로운 일이라는데...
억새를 흔들고 바람이 지나갑니다
여자는 잔별들 사이로 등을 꽂습니다
가지런히 빗질을 하고
일생의 거울 속에서 여자는
그림자로 남아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씁니다
산국화가 피었다는 편지를
지웁니다
오래된 가을 / 천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해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같이
버림받은 기억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간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앉아 있는 마음일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 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조용한 일 / 김 사인
이도 저도 마땅히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추일서정 /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러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 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래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1940년 7월 인문평론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 채호기
할머니는 마당에 붉은 고추를 넌다
베지 않은 키 큰 옥수숫대가 있고
누렁빛 들판에는 풍성한 예감이 있다
먼 데 산이 선명하다
형은 펌프 옆에서 양말을 빨고
하, 참 이 가을엔
햇빛이 뼛속까지 보이는구나
향수 / 박세영(1902 - ) 호 白河. 함북 출생.
아 - 그립구나 내 고향,
익은 들이 물결치는 가을
누르런 들과 새파란 하늘을 볼 땐
생각키느니 내 고향
산골짜기엔 약수
마을 앞엔 푸른 강
강엔 배 띄우고 고기 잡던 옛시절
내 고향은 이리도 아름다워라
산 없는 이곳에서
물 흐린 이 땅에서
흘러 다니는 나그네 몸이 외롭구나
지금은 추석달, 끝없는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저 달
북만北滿의 들개 짖는 소리에 마음만 소란쿠나
고향의 하늘을 날으는 새, 땅에 기는 짐승들도
지금은 따스한 제 집에서 단꿈을 꾸련만
팔려 간 노예와 같이
풍겨난 새와 같이 이 몸은 서럽구나
고추를 널어 새빨간 지붕
파란 박은 實貨같이 넝쿨에 달리고
방아 소리 쿵쿵 울릴 때
이 가을, 이 추석을 맞는 이
아 - 고향에 몇이나 되노
가라는 이 없건만 아니 나오면 왜 못살며
들은 익어 누르른데 배를 곯리지
않으면 왜 못살더란 말인가?
사랑하는 연인과 결별하듯이
내 고향 떠난 지도 이미 십년
그야 이 내 몸뿐이랴
마을의 처녀들도 눈물지고 떠나들 갔으며
마을의 장정들도 고향을 원망하고 달아났다
그리운 고향은 야속도 하구나
수수이삭에 걸린 추석달
잠든 호숫가에 거니는 기러기
지금은 그 멀리 들릴거라 다듬이 소리
아 - 그립고나 이 내 고향!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년
홀로 남기 / 프로스트
예전에 어디에서 들은 적 있었던가?
바람이 이토록 사납게 바뀌는 것을
닫히지 않으려는 문 열린 채 쥐어잡고
저 언덕 너머 해안의 물거품을 바라보는 내 모습을
바람은 도대체 무어라 여길까?
여름이 지나고 오늘 하루도 지나 이제
어둔 구름이 서쪽 하늘에 모인다
저기 쳐진 현관 마루
회오리바람에 요란하게 올라온 나뭇잎들이
내 무릎을 부딪히려다가 스쳐갔다
그 소리 속의 불길한 무엇이
내게 비밀을 밝히라고 알려준다
내가 집에 혼자 있다는 소문이
밖에서 나돌았나 보다
내 일생 동안 외로웠다는 소문이
이제 내게 남은 것은 神밖에 없다는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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