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암과 싸워 이기려면 ▶

◈ 완치 판정을 받기까지 지난 수술이후 7년 동안 투병해온
저의 경험을 토대로 환우들께 도움이 될까하여 올려봅니다

1.암과 싸워 이기려면 과학적인 방법이 우선되어야한다..

◀1998 년 10월 14일▶
직장암 3기 b 판정수술..
저의 투병기에서 밝혔듯 3기 B 병기로 직장 하부 7CM 쪽에
(종양크기 7.4CM X 4.7)의 큰 종양과 아래 3CM 쪽으로
4개의 작은 파종전이가 있었으며 주위 정상 조직에도
육안적으로 관찰되지 않는 미세 전이 병소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소견을 받았습니다.

신장170CM 에 수술후 체중_46KG 의 체력을 가진 저에게 주치의는
수술이 끝난 3주후 조심스럽게 라듐 고압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를 권하였습니다.

물론 당시 제가 사용했던 칵테일 요법의 3가지 항암제는 독성이
매우강할뿐 아니라
그 후유증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약물이었고. 체력이 약한 환자에게는
그야말로 큰 타격을 줄수도 있는 약물이 었습니다.

<참고:옥살리프라틴, 캠푸토. 5Fu제재 혼합 제재 사용>

특히 약물의 용량을 체중에 비례하여 투입하는 것 역시 사람의 체력과
항암제의 반응도가 다르기때문에 위험부담이 큰 것임에도 저의 혈종내과
주치의는 과량 투여를 시행 하였습니다.

이로인해 백혈구,적혈구.혈소판 수치가 급격히 감소하여 무균실로 실려가
8일동안 입원하는 고통을 겪었지만,

만약 당시 이같은 부작용을 무릅쓰고라도 방사선 치료와 항암제를
투여치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수 있었을까 하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술후에도 당시 나의 종양표지자 CEA가 7~9 를 오르내리고 있었으며,
항암치료 이후에 수치가 떨어지기 시작했던 상황으로 미루 볼때 분명
항암치료를 한것은 나의 판단이 적절 하였다는 것입니다

항암 약물은 그동안 수많은 임상 실험을 거쳐 발전을 해왔지만 우리몸의
암세포 역시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에 내성을 유발하는 인체 단백질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 항암제가 확실한 치료제 효과를 100% 발휘하지 못하고
재발이라는 문제점을 야기하는 점도 관과 할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척 한분이 비소암 폐암수술 7년째를 보내면서
항암치료를 하며 식이요법과 운동요법 으로
노력한 결과 8년동안 생명을 연장하다 척수와 뇌로 전이 되어
2년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일 아무런 항암치료 없이 있었다면 3년을 넘기기 어려웠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어떤분은 5~6년이 넘은 이후에도 항암치료를 하면서 살아가고 계시는
환우들도 종종 계십니다.

제가 5년차 되던 그해, 병원에서 투병사례 발표가 있던날 어느 난소암
환우 한분은 12년차 4차례 수술을 해가며 항암치료를 하던중 마스크를
하고 연단에서서 자신의 투병사례를 발표하는 감동적인
상황도 보았습니다.
이같은 모든 사례에서 보듯~
일단은 생명 연장에 상당한 효과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현대과학의
의미를 간과 해서는 절대 않되리라 생각합니다.

생명은 소중한 것입니다.
실례로 저의 죽마고우가 저와같은 직장암에 걸려 2004년 10월, 재발한이후
재수술과 항암치료 권유를 거절하고_대체 치료방법을 통해
극복하겠다고 산에 황토방을 짓고 강원도로 들어간지 만 3년여 만에
온전신에 암세포가 퍼져 작년 12월 운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저에게 임종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난 그친구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너무도 아쉬운것은 _
만약. 당시 그친구가 저의 권유대로 수술을 받고 항암치룔 했더라면 그는
지금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큰 상황이라고 판단 합니다.
당시 재발은 간에 국소 적이 었으며 당시 모 병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홀륨치료법이나. 고조파 치료로서 얼마든지 가능한 부위 였기 때문입니다.

대체 치료역시 꼭 필요하지만 우리 몸에서 생긴 암덩어리는 근치적 절제술
이 시행된 이후에 하는것 이라야 효과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환우들과 그 가족분들은 이 점을 분명 확실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같이 중증 암환자의 종양이라면 천문학적인 숫자의 암세포 포자를
날마다 퍼뜨리고 있는 원발암 종양을 제거하지 않고 암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은 위험한 생각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2. 대체치료는 좋은 식사와.운동. 좋은공기와.마음의 평안이 기본이다.

항암치료를 11개월만에 끝내고(부정맥 중심관 시술) 저는 아내에게
더이상 의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3년병에 장사 없다는 옛말이 있듯
암이라는 병은 5년동안을 병마와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 스스로가 병마와 싸우지 않으면 않됩니다.

가족들의 협조가 절실하지만 가족들이 지치게 되면
투병하는 환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아픈 환자를 마주 해야하는 가족들에게도 이만저만한 고통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이후로 저는 혼자의 힘으로 감내하기로 결단하고 곧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리고나서 스스로 항암 식단을 배우기위해 공부해가며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노력을 한 결과.
6개월 이후 저는 스스로 한달 동안의 식단표를 작성하였고 하루하루의 일과를
정확하게 이에 맞추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항암치료 이후 상당기간동안 마음의 평온을 찾기 위해
되도록 산 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가장 위험한 시기를 산에서 보내며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였습니다.
결국. 좋은 공기와. 마음의 평온.두가지 목표는 이룰수 있었지만
항암 식단을 맞추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우선 항암.방사선치료 후유증으로 체력이 뒷바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저에게 행운이었던 것은_
당시 충북의 음성의 어느 농장을 경영하시는 수녀님을 알게 되어
그곳에서 모든 무공해 채소와 과일,녹즙재로 등을 공급 받고 있었기에
그나마 큰 도움을 얻었다고 생각됩니다.

저에게는 생명의 은인과도 같았던 그 수녀님께서는 지금 천국으로 떠나가시고
안계시지만 5년여 동안을 저에게 정성껏 보내주셨던 그 수녀님을 잊을수가
없어 묘소에 꽃다발을 들고 찾아가곤 합니다.

특별히 3기 이상되신 중증 환우들께서는 3년동안의 투병생활을 좀더 진지하고
정확히 실천할수있는 투병생활의 목표를 세우시는 것이 좋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제목 : ♧ 의사에게 맡겨진 내생명 (나의 투병기중에서)▶

<수술에서 항암치료 까지>

◀1998 년 10월 14일 내나이 이제 48살..
대한민국 역사이래 가장 혹독했던 시련인 IMF 가 찾아온 시기.
암울하고 고통스럽기만 했던 그시기에 나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는 장성한 나의 아들이 되어있지만 당시 사춘기에 접어든 고1년생의

학부모로서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도 힘든 시련이었기에 나의 인생에 있어서
그시간은 내가 눈을감는 그순간까지 영원히 잊혀질수 없다.

직장암 3기 b_림프절 전이 4곳. C/T소견:다른 장기전이 없음
급하게 입원한 S_서울 병원에서 수술을 마치고..
나는 지금 통계로 정해져 있다는 그생존율30~40% 내외에
힘겨웁게 매달리고 있었다.

나의 원발암인 직장종양은 7.4x 4.7CM 이었고. 항문으로부터7CM 위에
큰 종양이 위치해 있었으며 항문에서 3CM 떨어진 하부쪽으로 4개의
작은 종양이 차례로 자리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미 그정도로 진행된 암은 10년 이상 진행된경우가 대부분으로
고형암의 진행속도는 시간을두고 서서히 진행되지만 어느 단계가 되면
림프구와 .세포.또는 혈액을 따라 다른 장기로 전이가 일어난다.
물론 암세포 조직과 주변조직 세포 분화도에 따라 달라질수는 있다.

항문이 완전히 꽉막혀 수술을 더이상 미룰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여러 경로를 통해 S_서울병원에 유명한 의사를 찾아 입원수속을 밟았다.
입원 다음날 나의 상태는 너무도 다급한 지경에 이르러 주치의는 수술날짜를
다른 환자들보다 최대한 앞당겨 주었다.
수술 전날밤 9시_나의 병실을 찾아온 수술 집도의는 반드시 항문을 제거하고
스토마(인공항문)를 시술 하는것이 생명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고 강력히
권하였지만
나는 장애자가된다눈 고통스러운 운명앞에 어찌할바를 모르고 망설이고있었다.
아니, 나는 그때 심정으로 도저히 이를 수용할수가 없었다.
암환자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분노와 허탈, 삶에 대한 회의가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이런 삶을 사느니 보다 차라리 죽는것이 낫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때 심정으로는 그냥 조용히 죽고 싶었다.
드디여 수술 전날 밤_모든 검사를 마치고 늦은밤까지 수술집도의는 몇번이고
병실로 찾아와 스토마(인공항문을)를 시술을 거부하는 나를 설득했다.
인공항문을 (스토마를)시술 하더라도 생명을 잃는것 보다는
생명을 보존 하는것이 더 중요한 일임을 설득하며 배를 열어보아 항문주위
괄약근 조직까지 암세포가 파고 들었다면 반드시 모두 제거 하기위해
인공항문을 해야 한다며 설득 하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돌아갔다.

지금생각해보면-
공황상태에 빠진 환자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의료진이
노력한것으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당시 의술로서는 5CM 아래 암세포가 있을경우,거의 대부분
인공항문을 시술하는것이 통상적 수술 방법이었다.
(지금은 수술 기법이 발달하여 2CM 까지도 항문을 보존할수 있음)

사실 수술하기 며칠전 검사에서 이미 항문쪽으로 종양이
너무 커져있어 항문이 꽉 막혀있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손가락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정도로 암은 아래로 그렇게 커져 있었다.

변을 볼때마다 항문 밖으로 불룩 튀여나온 직장 종양부위
혈관이 터져 하혈을 쏟곤했다.
이제 나의 인생은 여기서 모두 끝나야 하는건가?...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 왜 나의 삶이 이래야 하는거지?

"그것도 48살의 나이에.....",

너무도 기가막힌 현실앞에 눈앞이 캄캄했으며
고통속에 몸부림을 쳐야 했고.. 때론 생을 포기할 각오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나는 몇번이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흔들곤했다.
그때마다 죽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오곤 했으며
그걸 부정 하고싶었다.
시시각각.말할수 없는 절망과 슬픔이 내 가슴속을 엄습해 오곤 했다.
더욱 가슴을 짓 누르는 것은 사업에 실패하여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술로서 세월을 보내다 첩첩산골로 들어가신 나의부모님 .....
시골에 계신 조부모님까지 책임져야 하는 장남 이라는

무거운 삶의 굴레가 힘겹게 내 어깨위를 짓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이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던
27 년동안의 세월이 너무도 서럽다는 생각에서
한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나는그렇게 수술 전날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
또한 이지경까지 이르도록 내몸을 돌보지 못한 바보같은
내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럽고 서러웠다.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
벼랑끝에서 있는 내자신을 보며 나는 나의신께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의 하나님~! 저를 이대로 버리시렵니까?"
"버리시더라도 저희아들 대학까지만 보내도록 하고 데려가십시요~!
그때는 혼쾌히 지옥불구덩에 던져지더라도 말없이 따라가겠습니다".

"하나님제가 살아오면서 무얼 그리 잘못했나요"?
나는 나의 신께 그렇게 원망을 쏟아내며 절규 했지만,
가장이라는 위치가 그날처럼그렇게 무섭게 다가선적은 없었다...
그냥 죽을때 죽더라도 어디론가 현실을 피해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한데대한 회한과 후회가 엄습해왔다.
수년간 자신의 몸을 챙기지 못하며 계속되어온

고통을 참고 살아온데 대한 자책과...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그날밤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루하루 나의몸을 파먹으며 자라온 악성 종양...
나날이 심해져가는 피로와 해마다 야위어가던 나의몸,,

나는 삶이라는 무게앞에 스스로를
돌보지 못한 혹독한 댓가를 지금 치루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걸 애써 잊으려했으며 설마 설마로 부정해왔다.
아니 병원에 가기 두려웠다는 표현이 옳은 표현일것 같다.
가끔식 아랫배에 쥐어짜는듯한 통증으로 웅크리고 앉아있곤 했던 그시간
그때 이미 암은 내몸을 그렇게 정복하고 있었다.
병기가 점점 깊어지면서 통증으로 화장실에 갈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해오곤 했으며....
변기에 앉으면 무엇인가 뜨거운 핏덩이가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들때마다 변기 안이 온통 빨갛게 피로 물들곤했다..
병원을 찾기가 너무도 두려워 차일 피일 미루던일
바보같았던 나의 삶...!.
그런속에서 화장실을 갈때면 무서움과 두려움에...
혼자서 아내가 듣지 못하도록 화장실 문을 걸어잠근채
어린아이처럼 변기위에 앉아 그렇게 훌쩍 훌쩍 울곤했다.
그렇지만 가장이라는 위치인 내가 아내에겐
정말 그런 약한모습 보이기 싫었다.
점점 약해져 가는 나의 모습을 느끼면서 나의자신은
하루하루 그렇게 무너져 내려가고 있다..

하혈이 쏟아지곤 할때면 우선 급한 나머지 지혈을 하기위해
"클로르마이신"을 동네 약국마다 다니며 사모아서 입에 털어넣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식이 충만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웃음...!

이렇게 보내온지 몇달...
내일아침 6시 나는 나의운명을 결정할 수술실로 향할 것이다.
스토마(인공항문)를 달고 남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사느니
나는 남자로서 당당한 삶을 살다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한다.

"깨끗하게 살다 죽자.~!"
혼자 중얼 중얼 거리면서 나는 끝까지 수술 집도의에게
항문을 보존 해줄것을 요청하며 고집을 꺽지 않았다.
수술실에 실려 들어가며 나는 또한번 주치의에게 당부를 하였다.
"선생님 스토마는 절대 않됩니다 ~!

선생님..절대 선생님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3시간의 수술을 끝마치고 중환자실에서 깨어나던 그시간
통증이 엄습해 왔다.
제일먼저 두손을 끌어당겨 아랫배 양옆을 손을 쓸어내려 보았다.
거기에 그스토마의 흔적은 없었다.참 다행이라고 안도 하면서도
죽음보다도 더하던 항문의 통증을 그때 비로서 느껴 보았다.
마약계 진통제도 아무 소용이 없는 그런 통증이 이었다..
그렇게 수술이후 1개월동안 극심한 항문 통증에 시달렸다
그 아픔은 지금 생각해도 두렵고 너무도 끔찍하다.
통증을 해결하기위해 아예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좌욕기에
털썩 앉아서 하루종일 보내는것이 일과였다

하루 24시간 중 15 시간이상 좌욕기에 앉아서 있어야했고.
밤을 새워 40회 이상 화장실을 들락 거렸다.
※괄약근이란 항문을 조이는 작용을 하는 근육으로
온갖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 이곳이 손상되면 남성기능 상실은 물론,

심각한 통증을 유발하게 된다.
끔찍하던 그 고통의 기나긴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그어떤 표현으로 그 고통의 시간들을 표현할수 있을지.
그로부터 20일후 가장 두려워하던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항암치료가 시작되던날 나의 주치의는 나의 고집때문에 환자의
삶의질을 최대한 고려했노라며 수술은 잘 끝났지만
앞으로의 예후(생존율)은 장담할수 없으므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가
상당히 중요하다며 항암.방사선 치료기간중 체력관리에
힘써줄것을 애써 강조했다..

나는 항문을 살리는 대신 수술 부위와 항문국소에는 남들보다
더 많은 양의라듐 (감마선)고압방사선 을 조사(照射)해야만 했다.
말로만 듣던 항암치료와 방사선의 부작용은 혹독했다.
처음엔 종양내과의사가 나의 항암약물에대한 예비반응검사를
실시하지 않은채 시작된 통상적인 항암치료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다.
사람마다 항암제의 성분에 대한 부작용이 다르며
어떤 사람들은 항암제 반응이 민감하여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하는데도
체중에 비례해 항암제를 투여했던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옥살리 플라틴과" "5_Fu 는 강한 독성으로 인해
온몸의 털은 다 빠지고 눈언저리까지 검게 변색되면서 내모습이 마치
외계인같은 이상한 몰골로 변모되었다.
거울을 보니 내모습이 꼭 그중국 영화에 나오는 강시 귀신같은 형상같았고..
그모습을 가리려고 나는 머리 전체를 가리는 모자를 사서푹
내려쓰고 외출시에는 가발을 쓰고다녔으며..
내몰골이 싫어 사람들과 만나는것을 일체 삼가했다..
항암치료 11개월중 항암약물 효과가 최고조에 달한
6개월차부터 방사선치료를 병행, 했으며,그 후유증으로 인해 설사.
구토를 심하게 하기도하고 때론 항문과 장벽이 헐어
선홍색 피가 섞여나오기도 했으며 때로는 장유착으로 고통을 받기도 했다.
체력저하는 물론이며 방사선과 항암치료가 겹치는 시간엔 더욱 고통스러웠다.

항암 주사를 맞고 핵의학과 방사선 치료실에서 이상한
기계앞에서 15분동안 엎어진채로 항문위족에서 배쪽으로 방사선을
쪼이고 나오면 기운이쭉_빠지고 배속은 우글거리며.빙글 빙글 세상이
돌아가는것같은 현기증으로 침대에서 1시간이상 누워
휴식을 취한 후에야 겨우 일어날수 있었다.

♧긴 죽음과의 사투_항암.방사선치료 를 시작하다♧
체중은 이미 47 kg 으로 내려가 있었으며 최악의 상황인 이런몸으로
항암치료를 견딜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몸은 점점 쇠약해져갔으며 눈은 휑하고 얼굴은 파리하다 못해
몰골이 말이아니다.

◀사용 약물 (주사제 사용중 혈소판 백혈구 감소로 약3개월후
부정맥 중심관 삽입)
카테터(약물주머니 펌프)를 차고다니며 항암치료 11개월간 시술
:옥살리프라틴, 캠푸토. 5_Fu제재 칵테일 요법혼합 제재 사용
◀부작용 :손발저림. 백혈구 감소(최소 600 개 이하 무균실 입원 2회 )
시력저하.근육통.어깨통증.구토.식욕부진.우울증.
상시피로.간기능저하.장유착.탈모.구내염.등

지금의 내 체력으로 그 무시무시한 항암화학 요법을 견디며 암세포와 싸워
내 생명을 지켜낼수 있을까?
두려움과 절망속에서 나는 하루하루를 힘겨웁게 사투하며
그렇게 겨우 겨우 이어가고 있다.
항암 주사실에서 주사를 맞는 순간이면 독한 약물냄새가 금새 코를 통해
입안가득 퍼져왔다.
순간 속은 메스껍고 공연히 울컥울컥 서러움에 눈물이 나곤했다.

수술을 담당한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는날 그는 나에게 의미 심장한 말을했다.
"암덩어리가 너무커져있고 주변조직의 세포 분화도가 좋지않아 앞으로의 예후는
지켜봐야 할겁니다.
허지만 체력 관리만 잘하시고 항암치료 잘받으면 괜찮을겁니다...
......"선생님 그럼 제가 과연 살수는 있는겁니까?
"인생만사 팔자소관 아닙니까"? 어쩌구 저쩌구..."그럼 난 어찌 되는 겁니까?"

"그렇겠지요,~!
어련 하실려구요 ,설마 내가 그렇게 죽기야 하겠서요..........??"
이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음 한켠에선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고있었다.
한편으론 "그래 하루에도 교통사고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까짓거 남들보다 조금 일찍가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을하며
위안을 해보곤했다.

"어쨋든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도 48세라는 나이에 암으로 이렇게 죽을순 없지."....
마음속으로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이렇게 중얼 거렸다.
앞으로 내가 해야할일은 항암치료후 여러가지 대체요법을 병행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자는 생각 뿐이었다.
하여간 완치의 가능성은 적지만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 남는것외엔
다른방도가 있겠는가?

"빌어먹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길래 얼른 죽으라고 하는지
열심히 살아온 죄밖에 없는데"....
"그냥 암으로 죽기보다는 살아남는 생각만 하면서 살자"..
이런 생각을 하는 날도 꽤 많았다..

미국에서는 아주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사가 중환자에게도
모든것을 직접 다 함께 터놓고 이야기 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그때만해도 쉬쉬하면서 보호자이외엔
절대 말 하지 않는것이 상식이던 시기였다...
그러나 서구에선 보호자든 가족이든 다른 사람에게든 나의 현실을
알리는 것은 환자의 보장된 권리랍니다.
인간의 생명, 생명의 존엄성. 내인격에 대한 존엄성의 프라이버시는
자기 자신,즉 환자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만....
항암치료를할지, 말지, 방사선을 해야할지 말지...
이 모든 판단과 선택을 환자가 의사의 조언을 듣고 스스로 결정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것이 반반이랍니다.
병원에 따라서, 의사에 따라서 환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보호자에게만 알리는 경우가 있고 그렇답니다.
전체적인 통계로 보면 50 대 50으로 반반으로 보고되어 있습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는 환자에게 직접 이야기 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이것은 환자자신이 남아있는 시간들을 더욱 소중하게
쓰게 하기위하도록 하기위한 배려이겠지만. 내가 수술할 당시만해도
보호자를 불러서 보호자에게만 알리고 환자에게 알릴지 말지 하는 선택은
보호자에게 맡기는것이 원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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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하며 그렇게 암과 사투를 벌이는 시간...
종양내과 ooo 박사는 내 의도와는 달리 교과서적으로만 말씀하신다.
환자들을 대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어서 인지
인간적인 대화를 기피하는듯 했다.
오로지 수많은 임상 경험과 그에 따라 의학적으로 정리된 결과만 가지고
인간미 없이 학술적으로 인정사정 없이 냉정하게 객관적인 이야기만 했다.
나는 인간적 대화를 갈망했다.너무도 힘들고 외로웠으며
의사선생님 바짓가랭이라도 붙들고 싶었다.

◀1998.12.14일
항암주사치료 10여일째 되던날 나는 무균실로 실려가야 했다.
항암제주사를 맞고 집에 돌아온이후 아주 심한 오한과 발열로
온몸이 떨려 왔으며 감당하기 어려운 통증이 전신을 엄습해왔다.
찬바람을 쏘이고 정신을 차리기위해 현관 아래로 내려가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최악의 항암주자세 부작용인 백혈구저하로 인한 합병증이 생긴것이다.
당시 백혈구 수치는 400~600 을 오르내렸다.(건강한 사람의
평균치4000~6000개)
소란 스러운 소리에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 바닥에 나는
그렇게 누워있었고 아내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병실이 나지 않아 무균실로 신속히 옮겨져야 하는데 환자가 밀려있어
그러지 못했던 것이었다.

몇시간후 -
나는 아내의 울부짖음을 뒤로한채 사방이 유리벽에 둘러쌓인
무균실로 옮겨졌다.
얼굴을 가리고 마스크로 중무장한 간호사와 혈종내과 주치의가
분주히 오고갔고 내 혈관속의 항암제를 씻어 내느라 야단 법석이었다.
나는 다시금 인간적으로 종양내과 선생님의
따듯한 마음을요구하고 싶었지만 너무도
밀려드는 환자로 눈코뜰새 없는 상황에서 그런 의사에게
그걸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명씩 밀려오는 환자들을 치료해야 했고
너무도 급박하게 상황이 악화되어있는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하루에도 수십명씩 암환자들과 대면해야 하는 그로서는
무척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때 그 상황을 지금도 나는 잊을수 없다.
냉정하고 차갑기만하던..그리고 전혀 말이없던 종양내과 주치의..
그를 쳐다보면서 히포크라테스의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고 씌어있는 글을 읽어 본적이 있느냐
그에게 따져묻고 싶었다.
당시만해도 의사의 권위는 상당하던 시기였기에 환자의 신분으로
감히그럴순 없었다
아니 그분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대하며 이런 저런 일들을 경험했으므로
그런저런 일에 대한 대처 방법에 익숙해져 있는듯 싶었다.

환자들은 의사선생님의 말한마디에 엄청난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을 만나겠지만 환자마다 병기가 다르고.
.반응이 다르고.. 구체적인 형편과 사정이 제각기 다를텐데.
그렇게 아주 냉정하게 표정도 없이..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방법으로 구분해서 획일적으로 정리된
결과로만 말씀하신다면.....
그것 역시 환자에 대한 아픔을 이해하는 의사가 아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예단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고 싶었다.
그러다가도 어느날엔가는 너무도 힘들어 그에게 매달려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다 .
이런 그와의 인연? (심각한 항암 부작용)으로인해
나는 훗날000 종양내과 주치의에게 따지게되는 시간이 오고야 만다.
(의사의 항암치료 중단 요구 때문)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생명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
그러는동안에도 나는 몇 퍼센트의 생존 대열속에 끼어들기 위해서
나의 고통스런 하루하루의 투병생활을 참고 이어가야만 했다.
같은 수술을 받은 환우들이 어느날 그렇게 죽어나가는 모습을볼때마다
불안하기도 하지만 마음의 평정을 잃고, 슬픈마음을 가눌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우리 가족에대한 미안한 마음과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데 대한 괴로움.좌절과 절망,
그런것들이 뒤엉켜 나의 심사를 고통 스럽게 했으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만들곤 했다..
암환자들의 특징인 심경의 변화도 수시로 찾아왔으며 이로인해
우울증 치료를 받기도 했다.
어느날 나는 단호한 결심을 하고 주치의 개별 면담을 간청했다.
주치의는 감사하게도 자신의 연구실로 오후 2시쯤 오라고 했다
그때 나는 나를 수술을 집도했던 주치의 ooo 박사님 에게도
인간적인 애정과 관심을 최대한으로 가져 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
그리고 연구실에서 그의 눈치를 살피었다
나의 가장 가장 소중한 자존심 마저도 송두리째 내 동댕이 친채....
나는 그토록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또한 초조하고 안타까운 심경으로
너무도 간절한 마음으로 그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 참담한 심정 어찌다 말로 표현 할까?)
그리고는 다시금 간곡한 표정으로 나의 직장에서 주는 법정 휴직기간이 끝나면
이런체력으로 직장복귀가 힘들어 질텐데 직장을 정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저런 조언을 듣고 싶었다, 주치의의 눈치를 흘끔 흘끔 살피면서..
"그럼 선생님~! 제가 예후가 좋지 않다는 말씀 이신가요?..."
환자에게 앞으로 벌어질 샹황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실 수는 있으신지요..?"
ooo 박사는 어이없고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 뜸을 드렸다.
" 글쎄요...죽고 사는 문제가 모두 팔자 소관이지요"
모든것이 희망적이지 않다는식의 말투였다.
그순간에 나는 심장의 피가 멋는듯한 전율을 느낀다.
내가 그에게 기대하고 고대했던 그말이 아니었다.
내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그 냉혹한 판결문을 나의 주치의인
000 박사에게 듣는순간 나는 다리의 모든 힘이 일순간에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난 이제 어차피 죽어야 하는가 보다"...난 아직 돌봐야할 자식이있는데..!
슬픔과 분노를 넘어 체념과 공황으로 빠져드는 순간이었다.
순간 혼란스럽게 뒤죽박죽 믹서 되어 버린 머리 속과 입에서
나도 모르게 새 나오는 탄식의 외마디가 입에서 중얼중얼
나도모르게 흘러 나왔고
그것들은 앞뒤 두서없이 서로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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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우리가 건강한 몸으로 한평생을 살아간다는것.
그것이 그렇게 험난한 길임을 미쳐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루하루 몸을 아끼지 않고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되는줄로만 알았던 단순한 저의 짧은 생각이 어리석었다는것을
깨달았을때는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투병생활 10년 동안 나의 몸은 서서히 침몰해 갔으며
뒤늦게서야 나의 건강이 가족의 운명이 달린 문제라는것도
이때 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 5년의 세월 암투병 이후에도 병마는 약해진 몸을 파고들며
끈질기게 저를 괴롭혔습니다.
항암치료와 수술후 5년만 지나면 모든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오는 줄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 큰 실수 였습니다.

기나긴 항암치료의 후유증인 면역체계 손상으로 인하여 2007년초,
또 한번의 가슴 선종 제거 수술과 2008년초
면역력저하로 인한 대상포진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도 혼자라는 외로움에 단체모임에 나가 동료들을 만나면서
병원을 끊임없이 왕래 하였으며 ,
2007.10월 신장요도관을 따라 결핵균이 침투하여 심각한증상이
발견되어 재차 수술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면역체계 약화로 인해 어떤 경로인지 몰라도 잠복해있던 결핵균이
발병된것으로 추측됩니다.

수차례 병원을 래왕하면서 혈액검사,초음파를 실시 했지만
돌덩이처럼 단단한 종괴가 점점커지는 증상을 대형병원의사조차
확실하게 진단하지 못하였습니다.

불과 1개월여만에 종괴는 직경 5센티 정도로 크게 자라고서야
병원에서 급히 수술 입원하라고 진단을 내렸을 정도이니
결핵균이라는 것이 암처럼 어느정도 증식하기 전까지는 진단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폐로 가진 않았고 요도관과 부고환에만 자리하고 있어
급히 S병원 비뇨기과로 입원하여 부고환절제 수술을 받았으며 조직검사결과
결핵균임이 판명되어 1년여 이상 결핵 치료를 받고
지금은 완치된 상태입니다..
지금 나의몸은 체중이 불어 62Kg 으로 증가되었으며 항상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직장과 대장을 40cm 가량 잘라낸 후유증과 수술후
홀몬기능 대사 장애로 많은 신체적 변화와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고있습니다.

하루 컨디션이 나쁜날은 하루 10 여회,
컨디션이 좋은날은 7회정도 화장실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여행이나 등산 중에는 이런 신체적 조건이 너무도 큰 고통과
스트레스로 다가 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활의 불편함의_일부분일뿐..
지금 저는 그동안 수없는 재발의 위험을 극복하고 지금 이렇게 숨쉬며
살고있음에 항상 감사하며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면서 말합니다.
무척 젊어지고 멋있어졌다고.. .!!
"후후후...."^^ 가슴속에 감추어진 고통의 세월을 알지 못하니
하는 소리지만 듣기는 매우 기분 좋습니다...!

그러나 나의 미소속에 숨겨진 고통과 아픔을 누가 알겠습니까?
저는 잃어버린 10년의 세월을 보상받기위해 보다 더 젊어지려고 노력하며
좀더 내가 살고싶은 인생을 살기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금 내가할수있는 최선의 길임을 지금 잊지 않고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건강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유산소 운동의중요성과 우리가 하루세끼 먹는 음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그 모든 병의 치유의 근본이
운동과 음식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통하여 저는 암과 싸워왔으며 극복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식습관과 과도한 음주.흡연.잘못된 육류위주의 식생활과 더불어.
스트레스는 결국 무서운 병으로 귀결됩니다.
우리 인간은 높은 지적수준을 가졌기에 치유도 거기에

포커스가 맞추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의학의 높은 수준도 암이라는 병을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중증암의 경우 진전없이 답보상태에 있습니다.

단지 조기 진단의학의 발달로 인하여 초기 발견율이 높아져 생존율이
많이 향상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대장암이 위암을 제치고 1위의 암으로 급격하게 증가되었다는
점은 우리의 서구화된 식생활에 대하여
시사하는바가 크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이글을 쓰기까지 어느 암싸이트에는 오랜동안에 걸쳐
일기처럼 하루하루 저의 투병기를 올려왔지만 이제 뒤를 돌아보며
우리 환우들께도 좋은 교훈이 되리라 싶어 이글을 올립니다.

우리의 소중한 건강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 하는 마음이면서 ,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건강의 소중함과 가족의 소중함.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주위에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한
우리의 이웃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그분들을 따듯하게 배려하며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글을
쓰게 되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저와같은 고통을 당하며 살아오신 환우들과
그 가족들 정말 사랑합니다.~!"
모쪼록 용기 잃지 마시고 잘 이겨나가시길 바라오며...
항상 가족의 소중함과 따듯함.
나아가서 우리사회가 아픔을 당한 그분들에 대한
배려와 아픔을 서로 함께 나눌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곁에는 지금도 몇사람의 암환자분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을 돕기보다는 제가 그분들로 인하여 배우고 있다고 해야하겠지요.
그중에는 병기가 깊은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께 제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된다면 감사한 일이 아닐런지요^^*
그분들을 통하여 감사함과 겸손함을 배우게 됩니다.
또 한가지 감사한일은 최근들어 정부에서 암환자들을 위해
많은 정책적 뒷받침을 해주고 있어 암환자들에 경제적 고통이 대폭줄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암은 환자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까지 파탄으로 몰고가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병원치료비보다 훨씬더 무서운것은 대체 치료비 입니다.
불안한 나머지 근거도 없는 지나친 대체치료비의 지불은 결국 환자의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므로 암환자들은 세상의 따듯한 시선을 필요로 합니다.
많은 암환자들은 육신의 병마와 싸우면서도 한편으론
세상에서 소외되어 고통스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암환자들은 치료가된 이후에도, 상처입은 마음도 신속히
치유되어야 합니다
바로 정신적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도록 하기위한
전인 치료가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주위의 사랑과.관심과 배려라고 생각하며.
그것만이 그분들이 아픔을 이기고 새로운 삶을 찾는 큰힘이 될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오랜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며 묵묵히 지켜준
인생의 동반자 나의 아내에게 항상 고마움과 사랑을 보낸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2010 년 새해


-산초롱 씀-

 

암 환자 특이적인 생리활성 재현한 오가노이드 이용
대장암 화학항암치료(5-FU) 후 재발 억제전략 제시

5-FU 기반 항암제 처리 후의 p53의 기능적 양면성

[아시아경제 황준호 기자] 우리 몸에서 대표적인 암 억제인자인 p53가 역설적으로 암 줄기세포의 활성화를 도와 대장암의 재발을 돕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대장암을 비롯해 다양한 암 치료에 쓰이는 5-플루오로 우라실(5-FU) 기반 복합치료 이후 생존율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연구재단은 최강열 연세대학교 교수의 연구팀이 이같은 내용의 연구 결과를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실었다고 4일 밝혔다.

표준화학요법 이후 암 재발의 원인을 밝히다

5-FU 기반 항암치료 후 암 줄기세포의 활성화를 통한 재발 작용기작

연구팀은 대장암 등을 위한 표준 화학치료요법인 '5-FU 기반 복합요법' 이후 암 재발과 관련한 분자적 기전을 밝히는데 성공했다. 대표적 암 억제인자로 알려진 p53이 역설적으로 암 줄기세포 활성화를 도와, 암 재발을 유도한다는 것이 연구 결과다.

연구팀은 대장암 환자의 암세포를 배양해 만든 오가노이드와 대장암 생쥐 모델을 통해 복합요법 치료후 암 줄기세포의 활성화 여부를 살폈다. 오가노이드는 줄기세포를 배양해 특정 장기의 구조와 기능을 재현하기 위해 만든 장기 모사체를 말한다. 연구팀은 장 줄기세포를 배양해 장 오가노이드를 처음 제작한 네덜란드 후브레흐 대학의 한스 클레버 교수의 연구팀과 공동 연구를 통해, p53이 소실된 장세포 유래 오가노이드를 확보했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p53이 암 재발 과정에 있어서, 기존과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p53은 암 억제인자로 DNA 손상이나 비정상적 성장신호 등이 있는지 세포의 상태를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연구팀은 암이 재발하는 과정에서 P53이 암 발생과 진행에 신호 전달 역할을 하는 WNT 신호전달계를 자극해 암 줄시세포를 활성화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항암 치료 후 암 재발 막는다

WNT 억제제를 통한 5-FU 처리 종료 후 발생하는 암 세포의 재성장 억제

또한 연구팀은 실제 환자의 암세포를 통해 만든 오가노이드와 대장암 세포를 이식한 동물 모델에서 WNT 신호전달계를 억제하는 화학물질을 함께 처리했다. 그러자 5-플루오로 우라실에 의한 암 줄기세포 활성화가 저해되고, 단독 처리 이후 발생하는 종양의 재성장이 억제된다는 것을 확인했다.

연구팀은 "'5-FU 기반 복합요법시 약효 극대화와 재발 억제를 위해 WNT 신호억제제의 병용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연구"라며 "5-FU 기반 복합치료 후 빈번히 발생하는 암 재발로 인한 환자사망 문제점 해결 하는데 크게 기여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황준호 기자 rephwa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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